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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지역 거장들의 건축 세계

by wasabi-soso 2025. 8. 9.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

건축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벽과 창, 계단 같은 단순한 요소 너머의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는 건축가의 어린 시절, 그가 살았던 도시의 소리와 빛, 그리고 시대의 고민에서 비롯됩니다. 미주 지역에는 세계적인 건축상을 받은 이름뿐 아니라, 건축사에 길이 남을 실험과 도전을 해 온 이들이 많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프랭크 게리, 피터 아이젠만, 리카르도 레고레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그리고 루이스 바라간까지 다섯 명을 소개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이 왜 그런 건물을 지었는지는 직접 들여다봐야 알 수 있습니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 — 금속으로 만든 파도

게리의 어린 시절은 단출했습니다.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종이와 나무 조각을 가지고 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족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손을 움직여 무언가 만드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뒤, 그는 건축학을 공부하며 재료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작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한 도시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티타늄 패널이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외관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관광객은 물론 건축 전공 학생들까지 이 건물을 보기 위해 스페인 북부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습니다. 이후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도 그는 반짝이는 금속 외벽과 뛰어난 음향 설계를 결합해, ‘음악이 건물 속을 유영한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 — 규칙 속의 불안

아이젠만은 건축계의 ‘사색가’로 불립니다. 그는 설계 전에 먼저 개념과 철학을 세우고, 이를 구현할 방법을 찾는 데 몰두합니다.

그의 베를린 유대인 학살 추모비는 기둥의 나열로 이루어진 간단한 구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이 기울고 기둥이 높아져, 방향 감각을 잃게 됩니다. 단순한 산책이 갑자기 낯선 경험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아이젠만은 이를 통해 집단 기억의 무게와 혼란을 시각화했습니다.

또 다른 작업인 하우스 시리즈에서는 공간을 수학적 기호처럼 다루며, 조형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그의 건축을 보고 있으면 마치 책을 읽듯, 한 장 한 장 의미를 해석하게 됩니다.

리카르도 레고레타(Ricardo Legorreta) — 색과 빛의 건축

레고레타의 건축을 처음 보면, 색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장소의 공기와 시간을 담아내는 도구입니다.

카미노 레알 호텔은 강렬한 색면이 특징입니다. 핑크, 노랑, 파랑이 거대한 벽에 펼쳐지고, 햇빛이 비칠 때마다 색은 다른 표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태양이 그리는 그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그는 중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건물 내부에 열린 공간을 두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설계에 포함시켰습니다. 도시 속에서도 공동체적 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그의 접근은 많은 후배 건축가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 — 절반만 지은 집

아라베나는 칠레 출신으로, 사회문제를 건축의 핵심 과제로 보았습니다. 그는 부유층을 위한 고급 주택보다, 다수가 겪는 주거 불안을 해결하는 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의 킨타 모놀로 주택 프로젝트는 매우 단순하지만 혁신적이었습니다. 제한된 예산으로 모든 집을 완성하는 대신, 기본 구조와 필수 공간만 지었습니다. 나머지는 거주자가 직접 확장하도록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민들은 자신에게 맞는 집을 만들었고, 지역 사회의 주거 수준은 장기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이 ‘절반의 집’ 전략은 이후 여러 나라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아라베나의 설계는 ‘건축가의 작품’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의 건물은 완공 순간이 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계속 변해 갑니다.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 — 고요한 정원의 시인

바라간은 멕시코 건축의 시적 감성을 세계에 알린 인물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고향의 정원과 종탑, 빛이 벽에 그리는 그림자를 깊이 기억했습니다. 이 기억이 훗날 그의 설계에 고스란히 스며듭니다.

그의 대표작 바라간 하우스는 단순한 벽과 문, 그리고 빛의 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집 안에 들어서면 색과 빛, 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는 인공과 자연의 경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공간이 사람의 감정을 감싸도록 했습니다.

바라간은 종종 ‘침묵이 깃드는 집’을 설계했습니다. 소란한 도심 한가운데서도, 그의 건물 안에 들어가면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그는 미주 건축가들 중 가장 ‘내향적’인 거장이었습니다.

다섯 거장이 남긴 공통의 유산

이들은 전혀 다른 스타일과 철학을 지녔지만,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속한 지역의 빛과 재료, 기후를 존중했습니다. 둘째, 형태 실험과 재료 탐구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셋째,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건축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1980~90년대의 미주 건축은 실험적 형태가 주목을 받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이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다섯 거장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시대가 건축에 요구하는 가치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마무리

건축은 결국 ‘살아가는 장면’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미주 지역의 이 다섯 거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장면을 완성했습니다. 금속의 파도, 규칙 속의 불안, 색과 빛의 향연, 절반의 집, 고요한 정원…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사람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히 멋진 건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떤 도시와 공간 속에서 살고 싶은지를 묻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