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시를 걷다 보면,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남긴 발자취를 의외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단순히 멋진 건물 몇 채가 아니라, 그 건물들이 주변 풍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드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다섯 곳은 모두 세계적으로 이름난 건축가들이 설계한 국내 명소입니다. 각자의 철학과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 안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치 건축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듭니다.
1.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 자하 하디드의 유연한 상상력
동대문 일대는 원래 패션과 상권의 중심지였지만, 2014년 완공된 DDP 이후로 완전히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됐습니다.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이 건물은 직선이 거의 없는 유려한 곡선으로 유명합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흐르는 듯 보이고, 가까이 가면 수만 개의 패널이 미묘하게 다른 빛을 반사하며 표정을 바꿉니다. 내부 복도는 의도적으로 방향감각을 흐트러뜨려, 사람을 유영하듯 건물 속으로 이끕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외벽의 LED 조명이 켜지는데, 이때의 DDP는 마치 미래 도시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낮보다는 밤에 찾는 것을 추천합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곡선의 그림자가 달라져서, 건물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거든요.
2. 삼성미술관 리움 – 세 건축가의 대화
한남동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돌담과 유리 벽이 어우러진 미술관이 나타납니다. 리움은 세 명의 거장이 나란히 설계에 참여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마리오 보타는 전통적인 재료와 단단한 형태로 안정감을 주었고, 장 누벨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이용해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렘 콜하스는 아이들이 배우고 탐험할 수 있는 공간을 더해, 미술관이 단지 감상만 하는 곳이 아니라 경험하는 장소가 되도록 했죠. 이 세 가지 개성이 한 부지 안에서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광경이 참 흥미롭습니다. 건물을 감상하다 보면, 마치 세 건축가가 서로의 작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민현식의 잔잔한 설계
삼청동의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서울관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건축가 민현식은 ‘주변에 스며드는 건물’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 담벼락과 한옥 지붕선이 눈에 들어오는 높이를 넘지 않고, 회색 벽돌과 유리를 조합해 단아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전시실 안에는 높고 넓은 벽이 있고, 위쪽 천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시간에 따라 색을 달리합니다. 이곳은 작품뿐 아니라 건물 자체도 하나의 전시물 같습니다. 특히 가을에 방문하면, 뒷마당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건물의 차분한 회색과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4. 아모레퍼시픽 본사 – 사각 틀 안의 여유
용산의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사각형이 서 있습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외형만 보면 단순한 직육면체지만, 중앙에 뚫린 큰 개구부와 세 개의 하늘정원이 내부와 외부를 연결합니다. 내부는 사무 공간뿐 아니라 미술관, 카페, 도서관까지 있어 일반인도 일부를 즐길 수 있습니다. 유리와 알루미늄 루버가 빛을 부드럽게 걸러주어, 건물 안에서는 바깥보다 온도가 한결 느리게 변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곳을 해 질 무렵에 보는 걸 좋아합니다. 햇빛이 건물 옆면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다가, 어느 순간 금빛으로 번쩍 빛나거든요.
5. 부산 영화의전당 – 바다 위에 걸린 지붕
부산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영화의 전당은,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무대입니다. 오스트리아 건축 그룹 Coop Himmelb(l) au가 설계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지붕 구조물을 자랑합니다. 길이 85m에 달하는 지붕이 기둥 몇 개에 의지한 채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입니다. 해가 지면 LED 조명이 지붕 위에서 춤을 추고, 영화제 기간에는 그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편의 영화를 함께 봅니다. 기술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구조인데, 이런 건축물이 사람들의 추억과 도시 이미지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걸 보면 건축의 힘이 새삼 느껴집니다.
마무리
이 다섯 건물은 각기 다른 배경과 스타일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도시와 사람을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DDP의 곡선이 서울의 밤을 미래적으로 만들고, 리움의 세 건물이 대화를 나누듯 서로의 개성을 드러내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주변과 나지막하게 어울리고, 아모레퍼시픽 본사가 사각 틀 안에 여유를 담고, 영화의 전당이 부산의 밤을 환하게 밝히죠.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건물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이 공간들을 걸어보길 권합니다. 그 안에서 건축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몸소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